
저는 작년 퇴사를 하고 여러 일들을 시도해보며 매일매일 헤매고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김상현 작가의 《헤맨 만큼 내 땅이다》를 펼친 건, 어쩌면 그 헤맴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경험이라는 자산, 당신은 얼마나 쌓았습니까
저는 30대가 되어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해서 들어간 직장인데, 업무를 하는 많은 순간 "이게 맞는 건가"라는 의문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 의문은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또렷해졌습니다.
그 안에서 저는 작은 탈출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취미 클래스도 등록해 보고, 퇴사와 1인 기업가를 주제로 한 교육 프로그램도 기웃거렸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도들은 대부분 초라하게 마무리됐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 시간들이 완전히 낭비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내가 어떤 지점에서 한계를 느끼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김상현 작가는 좋아하는 일을 찾는 과정을 네 단계로 정리합니다. 경험 → 좋아함 → 몰입 → 사랑. 여기서 핵심은 '몰입(Flow)'이라는 개념입니다. 몰입이란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제안한 개념으로, 어떤 활동에 완전히 빠져들어 시간 감각을 잃을 만큼 집중한 상태를 뜻합니다. 작가는 바로 이 몰입의 반복이 자신만의 '결(Grain)'을 만들어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결이란 단순한 스타일이나 취향을 넘어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명확히 거절할 수 있는 자기 기준이 생긴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솔직히 저는 뜨끔했습니다. 나는 경험의 나열만 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경험을 쌓되 그것을 내 안에서 소화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건너뛰지는 않았을까?
실제로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직업 전환 성공률은 단순한 직종 이동보다 자기 탐색의 깊이와 더 높은 상관관계를 보입니다(출처: 한국직업능력연구원). 많이 경험하는 것보다 경험을 어떻게 내면화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경험 자체가 자산이 되려면 그 경험을 자기 서사(Narrative)로 엮어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서사란 단순한 이력의 나열이 아니라, 개별 경험들이 하나의 일관된 맥락으로 연결된 이야기를 말합니다.
헤맴이 서사가 되는 순간
작가 김상현은 출판사와 카페를 동시에 운영하며 코로나 시기에 약 17억 원의 빚을 지기도 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강연장에서는 열심히 살라고 말하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공허함을 폭식으로 채우던 시절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몸무게가 103kg까지 치솟았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고 솔직하게 씁니다.
처음 이 고백을 읽었을 때 저는 이상하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제 경험상,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이 가장 무너졌던 순간을 이야기할 때 오히려 더 신뢰가 갔습니다. 완성된 성공담이 아니라, 헤맴의 한가운데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말하는 '헤맴'의 가치는 단순한 긍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이는 '시행착오 학습(Trial-and-Error Learning)'의 다른 이름입니다. 시행착오 학습이란 실패와 수정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최적의 방법을 체득해 나가는 방식으로, 교육심리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학습 이론 중 하나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연설에서 언급한 'Connecting the dots', 즉 과거의 점들이 나중에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다는 통찰도 결국 같은 맥락입니다.
저도 14년간 헤매며 찍어온 점들이 언젠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는 순간이 올까, 자주 생각합니다. 확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고백을 읽으며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헤매는 사람만이 자신이 어떤 풍경을 좋아하는지, 어떤 길이 맞는지를 몸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름길을 달리는 사람은 그 감각을 끝내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헤맴이 자산이 되려면 다음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경험 이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습관 (자기 성찰)
- 경험을 기록하고 아카이빙(Archiving)하는 행동, 즉 경험을 나중에 꺼내 쓸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보관하는 습관
- 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의 균형, 다시 말해 쌓기만 하지 않고 세상에 꺼내 반응을 확인하는 용기
적당한 야망, 그리고 지금 이 헤맴의 의미
그렇다면 헤맴의 끝에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요. 작가는 그것을 '적당한 야망과 높은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저는 이 표현이 꽤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보통 야망이 크면 행복이 유예되고, 행복을 좇으면 야망이 작아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 둘이 반드시 충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AI가 점점 더 많은 직무를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의 경험이 갖는 가치는 오히려 커질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말합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미래 직업 보고서 2023'에 따르면, 창의적 사고, 자기 인식, 경험 기반 판단력은 자동화가 가장 어려운 인간 고유의 역량으로 꼽혔습니다(출처: 세계경제포럼). 달리 말하면, 헤매며 쌓은 경험이야말로 기술이 복제할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영토라는 뜻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작가가 말하는 통찰이 충분히 공감되면서도 막상 실천하기가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불확실성의 안개 속에서 겁먹지 않고 자신이 믿는 가치를 일관된 행동으로 증명해 나가는 일,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저는 지금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책이 건네준 것이 하나 있다면, 지금 이 헤맴이 낭비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헤매는 과정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있고, 그 풍경이 언젠가 내 땅의 윤곽을 만들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방향을 잃은 느낌이 든다면 이 책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나아갈 용기가 되어줄 겁니다. 억지 위로가 아니라, 헤맨 사람이 헤매는 사람에게 건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